이면 탐색기

2015년 11월 4일 수요일

미니홈피의 추억



 모 유명 사이트에서 섹스칼럼을 정기 게재한 적 있다.
 여느 게시판 이용자들처럼 드문드문 기고하던 것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운영진 측이 쥐꼬리(?)만한 고료를 제의하며 정기 단독칼럼으로 투고토록 요청해왔는데, 재미삼아 하는 일로 객실값 정도는 벌 수 있겠다는 알량한 뿌듯함에 도취되어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국에는 '놀이'에 의무가 부여되면 '일'이 된다는 교훈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글이 게재될 때 마다 독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는데 한 번은 열혈독자 한 명이 사이트에 공개된 내 메일계정으로 이메일을 보내왔다. 내용인즉슨 섹스파트너 관계로 자신과 오랜 기간 만났던 여성을 내가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겠냐며 그녀의 신상정보와 싸이월드 주소를 보내온 것이다. 그가 헤어진 연인에게 앙심을 품고 신상정보와 허위사실을 유포하는지 알 도리 없음에도 장문의 이메일을 쓴 그의 노고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막상 들어가 본 미니홈피에 게시된 사진들은 그녀가 무척 매력적인 외양의 여성임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흥미를 느낄 수 밖에 없었지만 그녀에게 접근해볼 채널이 오직 싸이월드 뿐이었던 탓에 독자들에게 내 신상정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칼럼 코너이 종료된 두어 달 후에야 접근할 수 있었다.
 방명록에 진부한 멘트,"너무 제 타입이셔서 글 남겨봐요"를 남기며 시작된 작업은 그녀가 화답하는 순간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쪽지 릴레이는 문자 릴레이로 이어졌고 일상적 썸남썸녀의 대화에서 가끔은 섹스코드가 뭍어나는 대화로 이어졌다. 물론 정색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는 그녀를 첫 만남부터 취하기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당시 막바지 학부생 신분을 만끽하던 나와 달리 그녀는 이제 막 모 경제신문에 입사한 새내기 기자였는데, 빤한 기자 벌이에도 불구하고 소형 자가용(아반떼로 기억한다)으로 그 먼 거리의 통근을 감행할 만큼 겉모습에 치중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명석한 편도 아니었다. 대화를 나눠볼수록 그 저의가 빤히 짐작되는 질문과 언변으로 미루어보건데 스스로를 영악한 사람으로 여길지는 몰라도 "넌 겉은 강단있어 보일지 몰라도 여리고 상처 잘 받는 성격 같아" 따위 개소리에 "맞아, 맞아, 어떻게 알았어?!"라고 감탄을 마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마 그녀가 갑자기 시간이 괜찮다며 내가 사는 아파트 앞으로 예기치 않은 방문을 한 것도 실상은 내가 정말 거기 거주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었는지를 확인하려는 잔머리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무턱대고 찾아온 그녀의 차에 올라 캔커피를 함께 마시며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분명 그녀는 제공받은 정보와 완벽히 합치하는 신원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래서 메일 내용에 신뢰가 생길 수 밖에 없었고 비균등한 정보관계로 난 그녀에게 우위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첫 만남을 가장한 그녀의 깜짝 검증이 끝나고 이어진 문자메세지와 통화에서 난 전도양양한 미래가 예견된 청년엘리트지만 야한 소리도 천연덕스럽게 건넬 줄 아는, 소위 문무를 모두 갖춘(?) 짓궂은 남자로 입지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그 덕에 구체적인 펀치라인 조차 기억이 안날 정도로 수월히 두 번째 만남에서 사당역 모텔행을 달성했고 마침내 그녀의 알몸을 볼 수 있었다.
 그녀와의 섹스는 정말 감흥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과거는 미화되어 기억된다는 사실로 보정하더라도 그녀는 (현대의학의 힘을 다소 빌었지만) 엄청난 미모와 볼륨감 있는 몸매의 소유자였고 색기가 뭍어나는 인상이 타의추종을 불문할 정도임에도 섹스에 있어서는 영 잼병이었던 것이다. 즐거움을 좇고자 하는 섹스가 아닌, 이 남자가 이렇게 간절히 날 원하고 나도 이 남자가 마음에 드니 한번 응해준다는 식의 섹스. 조명이 밝은 것도 싫고, 화장이 번지는 것도 안되고, 힘든 여성상위는 고사. 섹스 내내 그녀의 관심사는 관계 중의 자신의 모습이 예쁘게 유지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재미 없는 섹스를 겪고서도 그녀의 미모는 그냥 놓아버리기엔 너무 아쉬운 것이었고, 익숙해지면 다른 모습이 나오리란 기대와 즐거움에 눈뜨는 그녀를 만들어보겠다는 도전정신에 시시때때 섹스를 요구하던 내게 그녀는 왜 섹스 밖에 모르냐고 타박하기에 이르렀다.
 어영부영 시간은 흘렀고 서로에게서 원하는 바가 극명히 다름을 자각해선지 멀어지는 내게 그녀는 원망하지도, 잡으려 하지도, 욕설을 퍼붓지도 않았다.

 그녀가 내게 남긴 유산이라면, 색기를 대놓고 흘리는 외양의 여성이 정작 잠자리에선 대부분 재미없다는 이론을 공고히 하는데 큰 기여를 한 점일 것이다. (물론 여자나이 서른 넘어가면 이 이론은 통용되지 않는다. 나이에 대한 타박이 아니다. 여자나이 서른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즐거움을 깨칠 연령대인 것 같다)








 후일담
1. 그녀의 간절한 부탁으로 그녀의 친구들과 내 친구들이 단체로 미팅한 적이 있었다. 교통방송에서 아나운서로 재직하던 그녀의 친구와 내 친구가 가라오케에서 조용히 사라진 일이 생생히 기억난다.
2. 그녀는 내 모친에게서 전화를 받은 적 있다. 만나는 여자는 있는 것 같고 애가 시험준비는 제대로 안하니 내 전화기를 훔쳐본 모친께서 번호를 적어두었다가 연락하신 모양인데 어떤 사이인지 묻고 xx가 시험준비에 소홀하니 잔소리 좀 해달란 얘길 하셨다고 한다. 그녀는 모친의 전화로 우리가 어른들께 공인받은 사이로 발전했다고 생각이라도 한 것인지 감격에 겨워 내 생활에 대한 잔소리를 마치 어머니라도 된 양 하곤 했다. 고맙다.  
 3. 5년 전 결혼한 그녀는 지금도 비싸보이는 옷으로 치장한 아들사진을 카스에 시시각각 바꿔가며 그녀답고 아주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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