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5년 9월 24일 목요일
보험 같은 남자
프리랜스로 메이크업 강사일을 하는 H는 자그마하지만 육감적인 몸매와 귀여운 마스크의 소유자였다. 접근하기 부담없을 만큼만 딱 예쁜 그녀 주위에는 불나방처럼 덤벼드는 남자가 많았고 그렇게 클럽과 나이트 등지를 전전하며 20대를 보내다 어느 순간 눈 떠보니 서른셋이란 나이를 인정하기 싫은 철부지 싱글녀로 남은 자신을 발견한 그녀였다. 이제 그녀를 향한 극진한 대우를 불사할 남자라고는 여유있는 40대 유부남 정도임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녀는 술김에 그들로부터 때론 재정적 지원까지 받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서스름없이 흘릴 정도로 자존감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술주정처럼 결혼이나 해버려야겠다며 재미교포 대니를 입에 올리곤 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대니란 남자는 그저 (쉬운) 여자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시시껄렁한 재미교포 정도로 예단했기에 그가 H를 진정 진지하게 여기리라 생각치 않았다.
더위가 시작된 지난 7월 초, 야근을 마무리하고 귀가준비를 하고 있는데 G에게서 가볍게 한 잔 하지 않겠냐는 전화가 왔다. 뭔가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잘 됐다고 생각하며 이태원으로 택시를 잡아탄게 9시 경. 다시 걸려온 G의 전화. H가 휴가 차 방한한 대니와 만나는 중이라는데 우리에게 가라오케에서 한 잔 사고싶다는 연락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 술친구 무리 중 H를 직접적으로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G가 한 다리 건너 아는 지인이었으니 우연치 않게 술자리를 몇 차례 함께 하다보니 묵시적으로 그녀도 무리의 일원으로 합류한 것이었는데 (솔직히) 가깝게 지내기엔 이질감이 많이 느껴졌던 위인이었다. 그럼에도 예전에 대니가 방한하면 같이 한 잔하기로 약조했던 것도 마음에 걸렸고, (무엇보다) 사오십 만원 어치 공짜 술자리를 제공한다는 호의를 거절할 마음도 없었다.
행선지를 돌려 마운틴에 도착한게 10시 남짓, 웨이터에게 예약자명을 말해주고 룸으로 에스코트 받아 들어서니 이제 막 술자리가 시작된 것 같았다.
처음 본 대니는 정말 내 상상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인사를 건넨다고 일어서서 악수를 청하는 그는 카키색 반바지에 하와이언 나염의 남방, 에어맥스 계열의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하얀 양말까지 단정하게 올려신은 모습이 60대 미국 백인관광객을 보는 듯 했다. 과체중과 고도비만 사이의 그를 보며 Danny보다는 (uncle) Dan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 여권과 달러뭉치를 꼼꼼이 챙겨넣은 복대까지 둘렀다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 쯤이 들었다. 인터넷 상에 덕후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묘사되는 모든 외양적 요소를 갖고있는 그는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었다.
난 예전부터 모임에서 소외(?)받거나 잘 섞여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주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그들에게서 흥미요소를 끌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의 옆에 바짝 앉아 그가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NBA 팬토크를 짐짓 심각한 척 나누었고 그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놀림당할 말버릇 하나를 찾아내 좌중의 관심을 유도하니 그는 이런 상황이 익숙치 않은 듯 어색해 했지만 한결 술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지며 자신감이 생기는게 보였다.
대니를 알아갈수록 그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그에게 유흥생활이란 IT firm 컴퓨터geek 동료들과 맥주 한 잔하며 NBA를 보는게 전부인 고리타분한 것이었는데 H에 대한 그의 연정만큼은 꽤나 절절한 것이어서 이미 지난 겨울에 H에게 함께 베가스에서 살자며 청혼을 했다는 것이다. 영어를 못하는 H와는 도대체 어떻게 소통하냐고, 혹시 몸으로만 대화하는거냐고 장난스럽게 묻자 얼굴이 새빨게 진 대니는 말을 얼버무리기 바빴다.
그 당시에도 이미 H는 따로 만나고 있는 유부남이 두 명 있었다. 대니가 화장실에 간 사이 H는 그 중 한 명과 전날 밤새도록 마라톤섹스를 해 피곤하다며 연신 소파에 누워댔다. 화장실을 다녀온 대니는 바보같이 피곤한 그녀를 걱정할 뿐이다. 대니와의 결혼을 내년에 감행해야할지 고민이라고 덧붙인 H의 푸념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H가 잡을 수 있는 멀쩡한 미혼남성이라면 대니가 최선임을 정작 그 둘 빼고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대니만이 비참해져가는 현실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임을 H도 알고 있기에 유부남 사이를 오가는 와중에도 대니를 완전히 놓아버릴 순 없었으리라.
내가 제2의 대니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뿐.
앞으로도 모임에서 H를 마주할 수도 있겠지만 일말의 죄책감 때문이라도 대니만큼은 함께 또 만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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