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5년 3월 20일 금요일

그의 결혼식


 고교동창 Y는 늘 노력에 비해 성과가 나오지 않는 불운의 아이콘이었다.
 하긴 녀석은 우리 학교를 일종의 기부전학(?) 형식으로 옮겨왔기에 공부머리가 다른 학우들 만큼 영민하지는 않았지만 선하고 진중한 녀석은 묵묵히 고민을 들어줄 주 아는 친구였고 그를 나쁘게 말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끝내 한 반에서 비sky로 진학하는 네다섯 명 중 하나가 된 녀석은 비록 예전만큼 자주 볼 순 없었지만 위안이 필요할 때 묵묵히 달려와 고민을 들어주는 좋은 친구였다. 그러던 녀석이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다른 친구들의 창창한 성과에 자극을 받았는지 뒤늦게 고시낭인의 길에 접어들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며 녀석은 점점 사라져갔다.

 오년 여 전 여전히 늦깍이 고시낭인의 지루한 삶을 반복하던 그에게 난 식사와 반주를 대접한게 우리 만남의 마지막이었고 그 후로도 몇 번 안부 문자를 보냈지만 답신 없는 그가 야속하고 섭섭하게 느껴져 마음 한구석 막연한 부채의식 정도로만 그를 간직하고 잊어갔다.

 그러던 Y에게서 오늘 전화가 왔다.
 그는 그간 미안했다며 자기 결혼을 알렸다. 평소라면 연락 않고 지내던 친구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전화에 형식적인 축하와 함께 혼인일시에 딱히 바쁘지 않다면 마지못해 참석하기 마련이었지만 그라면 정말 밀린 소식이 궁금했기에 반갑게 근황을 물었다.

 그는 오랜 고시낭인 생활에 결국 실패했으며 그 기간 중 자신을 뒷바라지해주던 띠동갑 간호사 아가씨와 아이가 생겼다고 한다. 부유하던 Y의 가세가 2000년대 초반 완전히 무일푼으로 전락하고 부친은 배임횡령으로 수감생활까지 했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양친은 며느리에 대한 눈높이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는지 그와의 인연을 끊었고 그는 아이가 세 살이 되도록 일가친척 누구와도, 친구 누구와도 연락 않는 잠행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단다. 그러던 끝에 결국 시험을 포기하고 3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면접 끝에 결국 첫 직장 첫 출근을 앞두고 있으며 이제서야 부모님과도 화해에 이르러 지각 결혼식을 치룬다기에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녀석의 곡절 많은 삶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난 꼭 참석하겠노라 약조하며 녀석과 꽤 친하게 지내던 고교동창들에게 귀뜸해둘테고 연락처까지 줄테니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고 소식을 직접 알리라고 이야기했다.

 특출나지도 않고 워낙 조용했던 녀석이라 Y는 친했던 친구도 많지 않았다. 그나마 그와 친했다고 할만한 다섯명 정도의 이름을 꺼내자 그는 그 친구들 결혼할 때 자기가 못가기도 했고 십수년 만에 연락하기 미안하다며 고사했다. 다소 초라한 결혼식이 될 것 같아 내가 총대를 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다섯명에게 각기 Y가 그간 어렵게 지낸 모양이니 꼭 같이 참석하자며 메세지를 남기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Y와 이십여 년전에 어울리며 지낸 친구들이었지만 십 수년을 연락없이 지낸 그의 딱한 사정을 모두들 짐작을 하고 있었는지 다들 꼭 함께 참석하자며 답을 보내온 것이었다. 사실 내 일도 아닌걸로 아쉬운 소리하는게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기꺼이 참석하겠다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다 감개무량할 정도였다. 그리곤 Y에게 다섯명의 연락처를 넘겨주며 밀린 얘기도 나누고 결혼소식도 알리라는 메세지를 보냈다.

 그의 삶을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규정하고 딱하게 생각하는 내 시혜적인 마음이 오만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친구들이 긴 말 없이 보내온 반드시 참석하겠노라는 답신만큼은 인간적으로 참 괜찮은 친구들을 내가 두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뿐 더러 세상이 훈훈하게 느껴졌다.

 후일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된 나를 도울 친구는 누굴까 생각해보게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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