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4년 10월 7일 화요일

매화수를 사랑하던 원


 2002년 가을과 겨울을 관통하는 시기를 함께 한 원은 서양회화를 전공하는 미술학도였다. 섹스로 시작된 관계였음에도 그녀의 작업실이 위치한 선릉에서 우린 곧잘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로 지냈다. 동갑내기였던 그녀는 소위 '빠른' 생일의 누나였지만 학번이 같았기에 연상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지만 방배동 카페골목에서 자주 술자리를 함께 하던 그녀의 사촌동생들은 나와 동갑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날 호형하는 요상한 족보에 난감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원은 내가 그들에게 형으로 대우받기를 원했기에 졸지에 난 한 살 많은 형으로 형 행세를 해야했다.

 찌개를 안주삼아 원이 좋아하던 매화수를 밤새도록 그들과 마시고 그녀와 카페골목 모텔로 사라지는 루틴은 반복되었고, 고작해봐야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똑똑하고 놀 줄 아는 형님으로 깍듯이 대접받는게 싫지 않았기에 짧은 기간 동안 우린 참 많이 만났던 것 같다.

가을의 끝자락에 접어들었을 때 그녀는 깜짝 여행을 준비했다며 기차표를 내밀었고 우린 교외 한 펜션에 당도해 근처 삼림을 산책하고 배드민턴을 치며 즐거운 가을의 청명한 정취를 만끽했고 채 해가 저물기도 전 방에 도착해서 몇 시간을 꼬박 섹스에 탐닉했는데 광란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우리가 끓어오르는 혈기에 정신이 없었는지 커튼도 치지 않고 고스란히 가을행락객들에게 라이브 섹스쇼를 벌였음을 깨닫고 함께 부끄러워했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졌음에도 내가 그녀에게 감사하는 점이라면 교제를 수락하기 전 내게 자신과 연인의 관계로 만나볼 의향을 물었기에 난 점점 연락이 뜸해지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003년 여름, 내게도 연인이 생겼고 그녀와 종종 수도권 근교의 펜션을 찾아 휴식을 갖곤 했는데 한 번은 함께 배드민턴을 치고선 예전 원과의 기억이 뒤섞이며 마치 전에도 함께 배드민턴을 친 적이 있다는 듯 실언을 건네는 바람에 난 무척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던 기억이 있다.

원과 그녀의 사촌동생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하면서도, 아마 지금 마주친다 해도 고작해봐야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의 희미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너, 나, 그리고 우리.

그녀를 떠올리면 지금도 그녀는 등산복을 갖춰 입고 혼자서라도 씩씩하게 산행에 나서며 외로움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산을 오를 것만 같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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