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4년 10월 25일 토요일

섹스테잎


 어린 나이에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자친구에게서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받고 사흘 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워낙 기별 없는 이별이기도 했지만 문자메세지와 통화로 이별선고라니 정말 예의를 벗어난 작별을 고한 그녀였다. 간절한 절박함은 분명 초능력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불면의 시간 동안 싸이월드에서 그녀를 대하는 투에 다소 미심쩍음이 느껴졌던 남자의 도메인 주소가 사진기억처럼 떠올랐고 그렇게 들어가 본 그의 싸이월드에는 익명으로 글을 남겼지만 애틋한 마음이 묻어나는 일련의 댓글 대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투에서 내 여자친구가 익명으로 남긴 글임을 직감할 수 있었지만 확증할 순 없는 노릇. 그러다 익명 댓글 삭제를 눌러본 뒤 여자친구가 비밀번호로 즐겨쓰는 네 글자를 입력하자 덜컥 지워지는 댓글에 내 마음도 덜컥 내려앉는 것이었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하긴 난 이성문제로 눈물 흘려본 적이 없다). 초조하고 이해할 수 없고 자존심이 상해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녀의 취향에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남자였다, 도피유학 몇 년 다녀온 그가 끄적여놓은 허세넘치는 영어 일기를 읽다보면 내가 다 부끄러워질 지경의 수준이었고 이태원에서 두어달 굴러먹은 수준의 영어 비속어 남발은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다녔다는 지방대는 한심하기 그지 없는 수준의 학교였고 아버지가 경영한다는 제과프랜차이즈 업체는 재무제표 공시 의무조차 없는 구멍가게 수준의 법인으로, 꼴에 그걸 또 경영수업 받는다고 지 차사진, 옷자랑, 골프클럽자랑글이나 올려대는 수준의 한심한 녀석이었으니 얼마나 자존심 상했던가. 그렇다면 섹스의 문제인건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내 성적인 능력에 있어 확신을 갖고 있기에 도저히 그런 이유로 날 떠난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다만 내가 연인관계에 있어 좀 불친절하고 딱딱한 구석이 많으며 상호의존적 관계설정에 부정적인 의사를 갖고 있어 그 양아치 녀석 마냥 소위 후빨 같은건 천성적으로 하지 못하는데, 고작 그런 유효기간 1개월 짜리 사탕발림에 그녀가 흔들렸다는게 실망스럽고 자존심 상하는 것이었다.

 한 달을 꼬박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어 한 나는 그녀와의 얽힌 모든 물리적 기억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사진, 편지, 선물, 추억을 공유하는 내 소지품 등 모든 것들을.

 그러다가 그녀와 촬영한 섹스동영상 클립 두어편을 디지탈카메라에서 발견하고 숙고에 들어갔다. 복수 유출 따위 위험한 발상은 조금도 해보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 화끈하게 그녀를 소유했던(?) 흔적마저도 이제 안녕이란 생각에 마음은 미어졌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절감시켜주는 흔적이니 차라리 지우는 편이 스스로에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마저의 흔적조차 제거해버린다면 이 기억이 실재했는지 조차 잊게되는 것이 두려웠다.
 (우습게도) 난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섹스동영상을 지웠다. 그녀를 다시 만지고, 안고, 살을 섞고 싶을 것 같았기에 가슴이 미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물론 그 은밀한 소장품이 내 조작미숙, 수리기사 등에 의해 유출될 일말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 시절 더 젊었던 우리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증거를 홀로 간직할 수 있는 특권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가능한 리스크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