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기 전부터 그렇게 되고야 말 것 같았다,
그녀와의 만남이 날 과시하기 위한 안주거리에 그치게 될 것만 같았던.
지난 초여름, 십년 전 톱스타의 문턱까지 갔던 그녀가 날 소개받아보고 싶다는 전언에 내 기분은 우쭐함에 가까웠다. 아직까지 결혼에 대한 절실함은 전무했기에 소개팅을 나가는 것조차 실례임을 깨달은 이후 그 흔한 소개팅마저 고사해왔던 나였지만 이 기회는 뿌리치기 어려운 것이었다. 비록 간간히 프로야구 시구 혹 종편채널 드라마 등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치는 그녀였지만 한때 엄청난 유명세를 누리던 그녀 아니던가. 왕년의 스타가 내게 오케이사인을 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녀의 연락처를 받고 바로 연락하기엔 괜히 우쭐함을 들키는 기분이었기에 일주일 여가 흘러서야 메세지를 남겼고 회신이 없어 곧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흥미로운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또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흘렀고 여름에서야 xx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 수면마취의 여파에 비몽사몽을 헤매던 중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었다. 그녀였다. 마취가 덜 깨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대화였지만 약속 일시,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며칠 후 그녀를 만난건 그녀의 동네 카페,
생각보다 차가 막힌 탓에 약간 늦어진다며 사과의 말을 전한 뒤 들어선 카페였지만 그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이 얼굴을 알아볼게 뻔한데 이렇게 공개된 공간을 약속장소로 잡은 그녀가 의아하기도 했지만 이내 카페로 들어선 그녀의 모습이 TV와 다를 것 없었기에 난 약간의 친숙함과 실망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간혹 연예인들을 직접 목격하게되면 실물이 훨씬 대단하다고 느꼈기에 다소의 실망감도 있었을테다.
초면에 오갈만한 뻔한 얘기를 재미없게 나눴고 그게 우리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으로 그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로의 가족사와 각자의 일을 화제로 한참 대화나눴다는 점에서 과연 혼기 꽉찬 남녀의 소개팅임을 실감했지만 그녀가 딱히 내게 호감을 보이는 일말의 징조도 느낄 수 없었기에 조금은 주눅든 채 대화를 이어갔던 것 같다. 부모님과 저녁식사 약속이 있다기에 우린 한시간 여의 대화를 마치고 헤어졌고 돌아가는 길에 친구부부의 집에 들러 맥주 한 잔을 마시고 귀가했다.
그날 자정 무렵, 그녀에게서 전혀 기대치 않았던 전화가 왔다. 그녀는 가족들과 식사를 마치고 청담에서 친구들과 와인 한두잔을 마신 뒤 운전해서 귀가하는 중이라고 했다. 미지근한 소개팅 후 의례적인 전화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쉽사리 전화를 끊길 원치 않는 눈치였다. 야심함을 빌어 두어시간 깊은 대화를 나눴고 물은 적조차 없던 자신의 예전 열애설에 대한 해명에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배우자상, 결혼생활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던 그녀. 그런 당돌하고 직설적인 화법을 엔터테인트먼트 업계에서 외교적 처세로 단련됐을 법한 연예인에게서 발견하게 되니 무척 신선하고 인간적인 친밀함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만나며 틈틈히 통화를 이어갔다. 직업적 커리어에 있어 고민 중이던 내게 그녀는 자기가 바라는 남편상을 들며 희망사항과 충고를 건넴에 주저함이 없었고 나 역시 그녀의 고충(나이 들어가는 여배우로서의 고민)을 들어주며 우린 가까워졌다. 그런만큼 섭섭함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데이트를 다닐 때 그녀는 한사코 각자의 차로 이동하기를 원했던 점,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이란 점을 내 직장동료들이나 친구들에게 아직까진 공개적으로 언급치 않기를 부탁한 점(그녀는 소속사를 막 옮긴 시점이라 이해해달라고 충분히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지만). 또 가끔 그녀는 연락이 하루 정도 두절되곤 했는데 밀당이라 이해하기엔 인내심이 부족한 나이에 들어선 나였다. 스킨쉽에 있어서도 그녀는 연예계 종사자에 가질만한 편견을 의식했는지 과잉으로 느껴질 정도의 경계심을 보여줬다
그렇게 애매함과 친밀함 사이를 표류하며 여름, 가을을 함께 했고 어느 늦가을 함께 술 한잔 마시며 아직까지 결혼에 대한 절실함이 느껴지지 않음을 고하자 그녀는 거짓말처럼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후일 그녀의 부친이 얼마 전 돌아가셨음을 전해듣고 그녀의 처지와 상황이 이해되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과시라도 하듯 불러대질 않고 거짓된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내가 마음에 든다던 그녀에게 미안하긴 하다. 지금도 절친들과 그 와이프들은 그녀가 TV에라도 나오면 재깍 내게 전화해서 무참히 화제거리가 되는걸 그녀가 모를 따름이니 말이다. 하긴 그녀가 스스로 이실직고하긴 했지만 내 부모님이나 나에 대해 뒷조사(?)했다는 점은 나도 기분 나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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