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3년 10월 22일 화요일

동갑내기 유부녀

 어드미션을 받아 미국 출국일만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 스물여덜의 동갑내기였지만 O는 결혼 5년차의 전업주부였다. H대에서 서양회화를 전공한 뒤 졸업하자마자 열 살 넘게 차이나는 남편을 따라 싱가폴로 이주한 그녀에게 기댈 곳이라고는 남편 하나뿐인 외국생활이 그녀에게 녹록치 않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남편과의 괴리감이 커질수록 그녀는 박탈당한 젊음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갖은 이유로 시시틈틈 한국을 오가며 숨 쉴 공간을 찾아 헤맨 것 같다.

 그녀에게 있어 시의적절한 상대란 표현만큼 나를 규정하기에 적확한 것이 없었으리라.
 허울 좋은 그녀의 결혼 생활에 위협이 될만 한 예속감 기반의 연애를 바라지도 않았고, 출국날짜를 뻔히 받아두어 몇 년을 미국에서 체류할 처지였으며, 적당히 유쾌했지만 그렇다고 섹스 후에 공허함이 밀려올만큼 얄팍한 영혼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니.

 내게도 그녀는 시의적절한 상대였다.
 (비록 동갑이었지만) 매력적인 유부녀에 대한 판타지를 충족해줄 수 있었고, 잘 빠진 다리과 힘을 주어 움켜쥐면 부러질 것 같은 발목, 항상 세련된 부띠끄 커스튬을 온몸에 휘감고 나타났지만 천박한 물신주의의 단면이라기보다 감각적인 스타일링이 돋보였으며 그간 만날 수 있었던 이들과 숙녀스러움에 있어 차별되는 성숙함이 있었으니. 더구나 아무리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이었다 한들 부부관계에서 다져진 내공 때문에라도 그녀는 자기 오르가즘은 자기가 챙길 줄 아는 정도의 괜찮은 섹스상대였다.

역삼에서 강남역 일대 강남대로변에서 만나 끊임없이 서로를 탐하고 그녀의 단골 회전초밥집에서 함께 요기를 하고서야 그녀는 처가가 있던 일산으로 다시 홀로 운전해가는 만남이 거듭되기를 십여 번. 처음에는 그녀에게 농담처럼 남편이 고용한 심부름센터 직원이 우릴 미행하는거 아니냐며 실 없는 농을 던지면서도 불륜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음을 느끼던 나였지만 만남이 거듭될수록 점점 죄의식은 무디어갔다. 마찬가지로 그녀와의 섹스에 금지된 관계가 안겨주는 스릴 역시 무뎌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혼하고서 자그마한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해보고싶다던 그녀는 서초동에 괜찮은 자리를 봐두었다며 같이 보러가자고 청했고 딱히 약속도 없었기에 흔쾌히 응하였지만 전날 밤 과음으로 전화기를 꺼놓은 채 초저녁 무렵까지 기절해있었나보다.
 전화기 전원을 올리기조차 두렵고 미안했지만 막상 그녀에게서 온 메세지라고는 두어번의 콜키퍼와 기다리다 먼저 간다는 내용이 전부.
 미안함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며 그녀에게 다시 연락을 취하기엔 그녀와의 섹스는 더 이상 자극적이지 않았던 것일까? 그녀는 애초에 내 인생에서 존재한 적 없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사라져갔다. 시시하고 비겁한 결말이 다시 한번 답습된 셈이다.

 살인적인 핸드아웃과 퀴즈에 시달리던 유학생활 와중 잘 나가던 시절의 기억이라도 더듬어보겠다는 요량으로 그녀의 블로그를 종종 방문하곤 했다. 결국 그녀는 소망대로 일산에서 자그마한 베이커리 카페를 열었고 아기자기하게 가게를 꾸려가는 일상을 담아낸 게시물을 읽으며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좇는 그녀의 열정은 학업에 지친 내게 자극이 되었다. 귀국 후 우연을 가장해 찾아가봐야겠다 다짐했지만 자그마한 그녀의 가게는 흐디 흔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바뀌었고 그녀 역시 내가 스쳐보낸 흐디 흔한 여성 중 하나로 남았음에 씁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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