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순한 J에게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육감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오목조목 깨끗한 인상과 하얗고 투명한 피부는 그녀가 무심한 듯 걸친 옷가지 속에서 더 빛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용산에서 카투사로 군복무하며 말년병장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던 2003년 1월,
어쩌면 민간인보다 더 민간인 같았던, 온전한 주말과 한-미 양국의 공휴일 그리고 휴가까지. 무료함과 싸우고 있던 시절이었다.
손예진 판박이라는 이대생을 알고 지낸다는 S에게 난 소개팅을 거듭 부탁했고 몇 번의 조율 끝에 J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강남역 어느 커피숍에서 만난 J는 소문만큼이나 청순하고 단아한 미소녀였지만 그녀의 단정하고 예의바른 성품만큼이나 차분한 어투와 목소리는 내게 왜 그리 따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내게 향기없는 꽃이었다.
그렇게 재미없는 그녀였음에도 내가 시간이 넘쳐나는 군인신분이었다는 점, (기이할 정도였던) 내 이대생 페티쉬, 걸어서 10분 거리에 살던 그녀와의 거리 등등은 그녀를 향한 내 도전정신을 유효하게 만들어주었고, 난 그녀와 섹스해보는게 당면과제였다.
우리 사이의 서먹함이 사라진 어느 하루,
강남역 한 바에서 우린 양주 한 병을 함께 비웠고 그녀의 부모님이 여행으로 비운 집으로 난 기어이 들어서고 말았다.
반라의 상태에서 격정적으로 서로를 더듬던 와중에도 내 손길이 그녀의 팬티로 내려가면 그녀가 순식간에 이성을 되찾는 일은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우린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라며 완고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서로를 원하는 이 순간에 충실해야하는 것 아니냐며 난 어영부영 본게임으로 넘어가려 애쓰기를 수차례, 결국 난 사랑을 고백하며 나와 사귀어달라는 말로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그녀와의 섹스는 참 재미가 없었다.
내 또래 많은 여성이 그랬듯, 그녀의 사전 속 섹스라는 어휘 자체에는 죄의식이 함의되어 있었고 '날 사랑하는 이가 원하기에 해주는 것'이라는 식의 시혜적인 섹스관이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태도로 이어지는 양태였다.
그런 그녀의 섹스관이 바뀔 수 있도록 즐거움을 가르치는 섹스 선생이 되어주기엔 그녀는 너무도 재미없는 모범생이었고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겠다는 의무감만큼은 있었던 탓에 난 그녀와의 만남을 이어갔고 그녀를 좋아하려 노력을 해봤지만 데이트의 말미마다 내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 듯 요구하게되는 섹스는 그녀에게도 고역이었으리라.
그녀를 대하는 내 태도는 점점 건조해져갔다.
그렇게 한 달을 의무감만으로 그녀를 대하던 중 난 그녀와는 너무도 다른, 도발적인 매력의 Y를 만나게 되었고(http://nitesoulseoul.blogspot.kr/2013/04/blog-post.html) J의 연락을 피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쯤 그녀를 피했을까?
Y의 차 안에서 희희덕거리던 때 걸려온 J의 전화를 Y에게 보여주며 난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Y는 그녀의 당돌한 성격만큼이나 당차게 그 전화를 받아서는 "오빠는 저랑 원래 만나고 있었어요. 잠깐 사이 안좋았을 때 그쪽이랑 만났나본데 이제 연락하지 마세요."라며 매몰차게 쏘아붙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선 Y와 난 함께 웃으며 조롱했던 것 같다.
내게서 연락이 끊긴 일주일 여 동안에도 J는 날 배려라도 하듯 집요하게 연락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걱정의 안부문자는 내 비겁함을 책망하는 내용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Y와의 통화사건 이후로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냥저냥 지나가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일년이 조금 넘게 지났고,
Y와도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된 어느 하루,
싸이월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어떻게 들어간 J의 미니홈피.
그곳엔 나와 헤어진 뒤 그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반 년 여의 그 흔적을 꼬박 읽어내려갔지만 날 원망하는 내용이 없어 더 미안할 따름이었다. '다시는 사람 마음을 갖고 이용하지는 말자'며 얼마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십년이 넘게 지난 지금,
그녀는 어여쁜 애기가 든 유모차를 끌고나와 듬직한 남편과 나란히 양재천 변을 거닐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마주치면 싱긋 웃어줄 것도 같다, 듬직한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안목을 선사해주어 고맙다며 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