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3년 4월 29일 월요일
섹스파트너, 어느 흔한 이별
섹스로만 소통하는 관계에서 신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자그마한 의구심도 불신으로 이어지기 어렵지 않은 관계에서 나를 경계하는 듯한 그녀의 시선보다 견디기 힘든 건 나 역시 그녀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
L양은 물리치료사였다.
소위 강남산 양산형 인조미녀였던 그녀를 알게 된 건 채팅사이트였고 우리는 첫 만남에서 서로 스타일과 인상만 확인한 채 상호동의 하에 바로 모텔로 향했던 단순한 관계였다.
서로 꽤나 만족스러운 섹스였기에 반 년 여 치열한 섹스파트너쉽이 지속가능했겠지만 그녀가 기억에 또렷이 남는 이유는, 남녀가 몸정이 깊어갈 때 발생하는 감정적 흔들림을 그녀는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남이 거듭되어도 그녀가 내게 건네는 말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내 취미가 무언지, 어떤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는지,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 어떤 섹스 판타지가 있는지, 심지어는 그녀 외에 따로 만나는 이가 있는지 조차 그녀는 묻지 않았다.
정을 통한 여성들은 늘 내게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며 내 경계심을 섭섭해 했고, 따듯함 속에 굉장히 차가운 면이 상존한다는 타박을 하곤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서 느낀 완강한 경계심이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을 지 모른다.
우리 만남은 모텔이란 공간을 넘어선 적이 없었고, 섹스와 샤워 외에 소비되는 시간조차 거의 없었다. 다만 내가 그녀를 뒤에서 안고있을 때 만큼은 그녀가 정서적으로도 자신을 내게 내맡김에 가장 유사한 체험이었다.
그녀를 떠올려볼 때 아직까지 생생한 것은, 과잉이 느껴질만큼 말끔하고 포멀한 그녀의 의상들이 옷걸이에 걸려 모텔 방 한쪽 벽에 정리되어있는 풍경과 그녀 배꼽의 큼지막한 큐빅 피어싱이다. 정상위에서 그녀를 포개어안으면 피어싱이 주는 묘한 촉각이 난 항상 좋았었다.
우리가 주고 받던 뜬금없는 연락은 '오늘 시간 괜찮아?', 'x시에 xx에서 봐', 마지못해 서로 보내는 듯한 '잘 들어갔어? 난 자려구' 정도.
어느 하루,
난 그녀에게 만나자며 문자메세지를 보냈고 약속장소와 시간 정도로 예의 간단한 답을 준 그녀였다. 그런데 잠깐의 게으름이 그녀를 30분 넘게 기다리게 만들었고 어느덧 내 차가 목적지인 사당을 10분 여 남겨둔 예술의 전당 근방을 통과할 때에 그녀는 집으로 돌아간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그녀의 완고함을 간파 못한 난 멍청하게도 '그럼 언제 볼 수 있어?'라 답문을 보냈고 몇 분이 흘러서야 그녀는 이제 연락안해줬으면 한다며, 기다리는 동안 자기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다는 대답을 보내왔다.
1,2년이 지나 스마트폰의 시대가 본격 도래하고, 그녀의 번호를 입력한 내 전화기 카톡에는 그녀의 변함없는 얼굴과 사진이 떠있다.
날 아직 기억하나 가끔 말을 걸어보고 싶지만 그녀가 그때 느꼈을 자괴감을 나 역시 다른 형태로 경험해봤기에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건강하게 지내는 것 같아 기쁘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에선 아직 예전 그 쓸쓸한 기색이 느껴진다.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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