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7년 4월 3일 월요일


 내 촉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외견적으로는 분명 품은 직한 여성임에도 왠지 몸을 섞어서는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미련없이 떠나보냈다, 설령 그녀가 내 거처까지 기꺼이 찾아와 온기를 핑계로 내 품을 파고들어도 말이다.

 물론 놓쳐버린 기회도 있을지 언정, 하나의 사건으로 난 더욱 내 예감을 맹신하게 되었다.

 이태원 글램이 문을 열고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주중 초저녁부터 만석인 테이블 상황에 친구들과 난 어이없는 심정으로 예약을 걸어놓고 인근 이자카야에서 잔을 기울이며 연락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은 길어져 포기하고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마시자는 내 제안에 친구는 2만원 찔러줬다며 연락이 오긴 올거라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기에 왜 하필 2만원이냐 타박하며 그를 조롱했다. 포기한 채 주종을 사케에서 소주로 바꿔 마시기 시작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전화가 온 것이다. 우린 주저없이 장소를 옮겨 글램으로 올라갔다.
 우리 테이블로 발길을 옮기기조차 꽉꽉 들어찬 내부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고, 스캐닝에 여념 없는 남녀의 눈빛이 사방에서 교차하며 레이저쇼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그나마 저렴한 위스키 세트를 하나 시켜놓고 칵테일 한 잔씩을 먼저 시킨 우리는 이 재밌는 풍경을 화제삼아 마치 우린 그 일부가 아닌 것처럼 방관자적인 조소를 보냈던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인파 속에서 허덕이며 착석할 테이블을 탐색하는 여자 일행들은 남성들로만 채워진 테이블만 스캔하고 있었고 그 중 적당히 눈이 마주친 두 명의 여성 그룹에게 바깥 쪽에 앉은 친구는 말을 걸어 우리 자리로 유도했다.
 무얼하는 사람이냐, 어느 쪽에 사냐, 지루한 문답이 오가는데 그녀들은 한사코 본인들에 대해 대답하기는 거부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대단하신 분들인지 비밀인지 모르겠다며 가뜩이나 우릴 평가하듯 이런 저런 질문을 해대는 그녀들에게 불쾌한 기색을 농담처럼 내비쳤고 내 옆에 앉은 T는 그게 뭐 중요하냐며 도발적인 눈빛으로 응수하는 것이었다.
 그래, 떡 한번 치는건데 네가 무얼하는 사람이면 어떻고 내가 무얼하는 사람이면 어떻겠냐는 함의로 난 그 눈빛을 해석했고 별 다름이 없었다, 날 마음에 들어한 모양이었던 T는 망설임 없이 각자의 친구를 버리고 나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죽전에 산다는 그녀를 생각하자니 강남 쪽 숙박업소 밀집지역을 택하는 편이 서로에게 편할 것 같아 역삼동을 불렀던 것 같다, 그러자 그녀는 즉각 오빠네 집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트렌치코트 밑으로 드러난 미끈한 다리만 당장 내 눈에 들어오는데 무슨 상관일까. 당시 내가 홀로 기거하던 아파트단지엔 경비아저씨가 상주하여 주민의 동향을 시시각각 살피는 풍경이라 아예 신경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더러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길까지라도 취한 티 내지말고 걸어달라 부탁하자 그녀는 무슨 의미의 청원이었는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집으로 들어와 그녀는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새삼스러울 건 없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생경하긴 그녀에게도 다를 바 없을테니. 생각도 없는 와인을 한잔 권하고 적당히 침대에 올라 몸을 섞고 일과의 방점을 찍고 싶은데 그녀는 자꾸 얘기가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기 얘기를 늘어놓던 그녀는 마치 엄청난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자기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예능인 xxx의 코디네이터라는 것이었다. 사실 내 흥미가 조금도 동하지는 않았지만 재밌는 연예계 방담이라도 두어개 듣게되면 재밌겠단 생각에 이런 저런 질문도 했지만 내 반응이 시큰둥하게 느껴졌는지 그녀는 기어이 내 전화를 들더니 확인시켜주겠다며 xxx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 목소리라도 확인해보자'란 심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더니 그녀는 기어코 스피커폰으로 그와 통화를 하더니 확인시켜주었다.
 그냥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굳이 의심도 않고, 그게 사실로 드러나더라도 내가 왜 감명받아야 할지 모를 일을 그렇게 강조하는지. 끊임없이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자기얘기에 성욕이 가시는 것은 모자라 졸릴 지경이었다, 적당히 좀 하지.

 지쳐감에 짜증도 나기 시작했지만 갑자기 그녀랑 자고나면 무진장 피곤한 일이 발생하고만 말 것 같은 예감이 엄습했다. 이제서야 잠이 온단 그녀를 침대에 뉘이고 난 한사코 거실 소파에서 자겠다고 이야기하자 그녀는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키스를 하는데도 성욕이 동하기는 커녕 빨리 모면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나란히 누워 잠깐 눈 좀 붙이자며 옆에 누워 금방 잠에 든 체 하자 뒤척이기를 잠깐 그녀도 곧 잠이 들었다. 숨소리가 깊어지고서야 난 거실로 나와 소파에 누워 비몽사몽 간에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살풋 잠이 들었나보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침 9시가 넘었다. 어제 촉 때문인지 그녀가 집이라도 털어갔을까봐 곧바로 침실로 가보았다. 위스키 냄새가 진동하는 침실에 그녀는 골아떨어져있다. 있지도 않은 누나가 곧 들이닥친다는 핑계로 급박히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얼떨결에 내 분주한 모습에 몸을 추스르고 옷을 챙겨입었다. 이대로 그녀만 보내고나면 그 성의없음에 조그마한 후환이라도 감당해야할 것 같은 마음에 그녀와 함께 집을 나와 택시에 앉혔다. 택시비라도 쥐여보내고 싶었는데 공교롭게 현금이 없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며 연락하고 한번 보자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아직도 잠이 덜 깨 얼렁뚱땅 우린 작별했다.

 그렇게 그녀를 보내고 주말 오후의 한가로움과 게으름을 온전히 만끽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별 생각 없이 받자 험상궂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이랑 지난 밤 함께 있었다는 여자아이의 삼촌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의 소개는 잔뜩 위압감을 담아 날 위협하는데 어찌된게 난 두렵기는 커녕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무언가 대화가 오가다가 성폭행을 주장한다는 조카아이의 안위를 걱정한 나머지 나와 대화를 해야겠다는 그에게 난 성폭행 피해자가 밟아야 할 구제책을 단계별로 설명해주었고 부디 빠른 시간 안에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에 내원하여 성폭행 피해사실을 신고하고 진단을 받으라고 권해주었다. 아울러 난 그녀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피의사실에 대해 내게 조사가 시작된다면 난 무고로 대응할 것임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별로 통쾌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건달마냥 위협을 해댄 그 삼촌이란 작자를 자극해서 가짜 진단서라도 발부받을까, 혹 위력의 증거를 그녀의 몸에 조작하거나 질벽에 마찰흔 따위를 조작하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삼촌이란 사람에게도, 그녀에게도 아무 전화는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자기가 xxx의 코디네이터임을 확인시켜주겠다며 xxx에게 전화를 건 흔적만이 그날의 일이 실재했음을 상기시켜줬을 뿐이다.

 친구들과 이 에피소드를 공유하며 술을 마시다가 xxx에게 장난전화를 몇 번 했었다. 그녀가 실제 그의 코디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소심한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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