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4년 12월 3일 수요일

허울 좋은 체면


 성악을 전공하던 T는 섹스할 때 도저히 맨정신인 자신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었다. 늦은 밤 뻔히 욕망을 해결하러 내 거처를 찾아와놓고도 기어이 친구들과의 포커회동이 남긴 위스키병을 찾아내 고주망태가 되고서야 옷을 훌훌 벗어버리며 날 올라타던 그녀였다.

 나 역시 음주를 즐기지만 유독 그녀와의 술자리에선 많이 마시지 않았다. 딱히 대화를 많이 나누고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는 공감대의 부족이라기보다 그녀가 자기 신상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걸 몇 차례 간파하고나니 나로써도 대화가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유독 음대생을 많이 만나본 까닭에 난 그네들의 학과별 커리큘럼과 스케줄을 대략 꿰고 있었는데 그녀가 성악전공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 여겨졌지만 그녀가 재학 중이라는 학교는 들은 풍월 몇 개로 사칭하는 것임이 분명했기에 추긍으로 비춰질까봐 대화에 소극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자기네 학교 위클리와 졸업연주회가 늘상 열리는 홀 이름을 기억못한다는게 말이 되지 않을 수 밖에) 이런 이질감을 간직하면서도 그녀의 새하얗고 좋은 피부와 늘씬하면서도 살집 잡힌 몸매는 모른 체 하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만남을 지속했다.

 그녀의 출몰반경이 압구정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밤도깨비에서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 2003년 늦봄 밤, 그녀는 자기 친구 중 가장 예쁘다는 예고동창 S를 불렀다며 나도 친구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덧붙이기를 S가 유혹하기 어려운 상대는 아니니 꼬실 수만 있다면 그녀와 섹스를 해보라며 자기도 내 친구가 마음에 든다면 함께 나갈 것이란다.

 여자들이 예쁘다고 칭송하는 동성친구들이란 대부분 자기보다 예쁘지 않기에 내 기대치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선약 자리에서 얼큰하게 취해서 들어온 S는 분명 대단한 미인이었고 취기 때문인지 서슴없는 언행으로 먹고죽는 분위기로 주도하는 것이었다. 곧 이어 도착한 내 친구는 두 명이나 왔기에 남자 셋, 여자 둘이 비워가는 소주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S는 내게 호감을 감추지 않았고 나머지 셋이 그녀와 날 엮어주는 분위기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T를 두고도 내 친구 둘은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T 역시 귓말로 마음에 드는 한 명을 지목했기에 그에게 귓뜸을 해줬다.

 게임으로 모두 취해버린 술자리를 계산하며 화장실에 간 T를 기다리며 그녀의 샤넬백을 다른 친구녀석에게 뺏기기라도 할까봐 소중하게 안고있는 친구녀석을 지켜보기란 여간 재밌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 밖으로 나오자 취할대로 취한 S는 대치동에 사는 전남자친구를 만나러 가야한다며 갑자기 지나가던 택시를 불러세웠고 T와 친구 두 녀석은 내게 방향도 같은데 데려주라며 택시 안으로 밀어넣으려 했다. S도 내가 당연히 합승리라 생각했는지 뒷자리 깊숙한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난 전남자친구를 만나러 그 새벽에 택시에 오르려던 그녀의 발화의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순간 고민했다. 다들 날 택시 안으로 밀어넣으려 했지만 난 끝내 S에게 조심해서 가라며 뒷문을 닫아주었다. 택시는 즉시 멀어졌다.

 결국 내 친구 중 한 녀석은 T와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을 섹스를 했다하고 나머지 한 녀석과 난 진지한 대화라도 나눠야했던 것처럼 심각한 술자리를 더 갖고서야 귀가했다. 귀가하는 내내 쓰잘데기 없이 순간의 체면을 중시하는 내 허위의식에 끊임없는 조롱을 보낸 것이 기억난다.

 몇 년이 지나서 우연히 연락이 닿은 T는 다시 엉망이 되도록 취해 나와 잠자리를 가졌고 그제서야 난 우리의 부질없는 관계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은 변하기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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