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또 다른 도피일지
부족할 것 없이 매력적인 상대라도 내게 커버린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연모의 마음을 드러내면 그 역학관계의 우위만으로도 내겐 그녀의 애정을 거부한다는 선택지가 늘어나게 된다.
종로 모 어학원에 일본어강사로 재직하던 A는 그 몸매를 훑어본 것만으로도 썩 만족스러운 섹스가 기대되는 여자였다. 60초중반의 키에 적당한 살집의 힙과 다리, 가냘픈 발목까지. 깨끗하고 흰 피부에 청초함과 귀여움의 아슬한 경계에 있던 그녀의 외양은 내게 온갖 변태력을 실현함에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의 아름다움이었기에 지나친 부담감으로 체면이 서지 않는 섹스가 되지 않으리라 자신감을 갖고 임할 수 있는 섹스였으니 내 기대는 타당한 것이었다.
차분하고 말이 많지 않은 그녀였지만 예상대로 그녀는 침대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못해 이성을 넘나들며 십분 쾌락에 자기 한 몸을 던져버리는 두 얼굴의 여성이었고 단 한 번의 섹스만으로도 서로에게 다음번 섹스를 위한 당위성을 느낄만한 흡족한 만남이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섹스 후 침대가에서의 대화는 많은 걸 바꾼다.
게이오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트릴링궐의 재원이었던 그녀는 나와 미술사, 문학사 전반을 넘나들며 심도있는 대화를 심도깊게 나눴고 그녀는 예기치 않은 즐거움에 동요하고 있었다. 팔배게를 하고 내 말을 경청하며 내 가슴께를 더듬는 손가락엔 그 동요가 고스란히 담겨있었고 나 역시 잠자리 상대 이상의 의미로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심정적 충만함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성급한 얘긴 줄 알지만"으로 시작하는 그녀의 직설적 호감표명은 이 모든게 부담스럽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더 사랑하는 자가 죄인'이란 진부한 표현을 싫어한다. 그녀는 거리를 유지하는 내 언행에서 그 진부한 표현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러나 난 내 얄팍함을 들키게 될까, 새로운 잠자리 상대를 갈망하는 저열함에 내 스스로 실망하게 될까 조바심을 느낄 뿐이었고 안정적 관계에의 막연한 공포심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철부지에 불과했다.
육년 여가 지난 지금 그녀와 만났더라면 도망치지 않았을까?
아마도 바로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는 퇴로만큼은 유념하며 '언제 끝낼 지' 생각해두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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