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4년 2월 7일 금요일

이별선물


 "에?"

 또 잘 들리지 않았나보다.
 그녀의 버릇인가보다. 조근조근 말을 건네면 여지없다. 거듭될수록 무례하게 느껴진다. 왜 그리 천박한지 모르겠다. 분명 선 본 사이니 그녀와의 결혼생활을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녀의 '에?'를 들을 때면 말문이 턱하니 막히는 기분이다.

 부산에서 예고를 나오고 대학 후배였던 그녀는 프리랜스 연주자로 활동 중이었다. 작은 키에 귀여운 용모 그리고 큰 가슴이 눈에 띄는 그녀를 모친의 지인에게서 소개받아 몇 차례 만났지만 사실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다기보단 그녀를 핑계삼아 나갈 때면 하사받는 부모님의 카드가 더 탐났던 것인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그녀가 살던 관악구청 건너편 빌라는 학부시절 가깝게 지낸 친구가 살던 건물이었다. 건물 께로 그녀를 바래다줄 때면 농활을 핑계삼아 친구집에서 일주일 간 숙식하며 술과 당구로 시간을 보내던 신입생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게 좋았다.

 신경 쓰이는 말버릇을 지녔지만 그녀는 엉뚱한 매력이 있었다. 술자리에서 둘 다 취기가 오르면 난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강박감에 말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녀는 기특하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귀 기울이는 모양새였다. 취중 방담 중에도 난 내 고리타분한 표면적 모습에서 상상키 힘든 자유분방한 면모가 있음을 드러내고 싶어했고 그럴때면 그녀는 턱을 괸 채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는 모습이 꽤나 사랑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녀에의 욕정이나 연애감정이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었던건 역설적으로 어르신을 통해 만났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내게 결혼은 너무도 요원한 것이었으니까.

 야근 후 늦은 귀가길, 신림동을 지나던 중 술 한잔 기울이고 싶은 기분이 들어 그녀에게 거의 1년만에 연락했다. 정신없이 바빴음을 핑계삼았지만 그녀도 자세히 묻진 않는다. 그녀에겐 난 나그네 같은 사람이었으리라. 그녀도 술이 올랐는지 1년 사이 짧았던 연애담을 들려주며 잘 사귀다가 갑자기 잠수타는 전 남자친구를 이야기하며 남자들의 속성에 대해 토로한다. 잔 다음부터 연락이 끊겼냐며 냉소적인 웃음과 함께 그녀에게 묻자 그녀는 전부터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왜 모든 문제를 섹스로 치환시키냐고 따져물었다. 뜨끔했다.

 그렇게 술자리는 길어졌고 그녀를 바래다주는 길, 쌀쌀한 날씨에 몸을 떠는 그녀에게 두르고있던 베이지색 머플러를 건넸다. 결혼을 생각했던 연인과 여행을 다녀오며 내 짐에 섞여 들어온 머플러였다. 그녀의 집 앞, 커피 한잔하러 올라오겠냐고 묻는다. 예기치 않은 호의에 잠깐 고민했다. 말 그대로 커피일 수도, 섹스의 진부한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기분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고 귀가길에 나서는 헛헛하고 공허한 마음이다. 다음을 기약하며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내게 큰 의미였던 머플러는 그녀에게 이별선물이 되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