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5년 9월 9일 수요일
어제 점심
그녀와 마주친다해도 상서로운 우연은 분명 아닐 것이다, 점심시간 그녀의 동선이란 것도 뻔한 것이요, 난 그녀가 어떤 출입구를 통해 오가는지 알 정도로 그곳에서 많이 만났으니까. 다만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서로를 인지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지 부지불식 간에 서로를 스치우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이었다.
사실 그 지역에서 점심식사 자리가 잡혔을 때 그녀와 우연히 조우하기를 소망했음은 분명한 것이다. 결혼할 뻔했던 옛 연인을 마주칠 때 드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내 스스로도 궁금하기 짝 없을 노릇이었으니까. 여전히 고개를 살짝 치켜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스틸레토힐을 또각거리며 걷는 그녀를 발견하고서 이제 두번 다시 놓아주지 않겠다는 마음이라도 들길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인산인해 속에서 정말 마주칠까 의구심이 훨씬 큰 것이었다.
11시 반에 정확히 시작된 점심식사는 점차 밀려드는 인근 직장인들로 30분만에 마쳐야 했다. 식사를 함께 한 선배는 점심을 내가 샀으니 커피는 자기가 사야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는지 극구 커피숍으로 가잔다. 일찍 식사를 마친 덕분에 그녀가 오가는 출입구에 위치한 커피숍에 홀로 앉아 예고된 우연을 기다려보겠다는 내 계획도 어그러졌다. 워낙 입담이 좋은 선배인 탓에 설사 그 커피숍을 방문해 앞을 오가는 행인들을 주시한다고 해도 그냥 스쳐보내기 십상이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게 또 운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린 선배의 이직고민을 화제삼아 열띤 대화를 나눴다. 어느덧 시간은 12시 반.
그때 거짓말처럼 출입구로 향해 천천히 걷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살짝 찌푸러진 특유의 표정으로 사무실로 돌아가는 그녀는 구석자리에 앉은 날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서로를 무심하게 스치울 수 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이 다시금 자각되었다. 펑퍼짐한 부띠크풍 원피스 드레스가 여간 비싸보이는 까닭에 취향은 여전하다는 냉소도 찾아왔지만 그녀가 여성성의 상징으로 집착하던 스틸레토힐 대신 캔버스 재질의 단화를 신은 그녀가 낯설었고 그간 나와 약속이 잡히면 차림에 여간 신경써서 나온 것이었구나 안쓰러움도 들었다.
내 시선이 그녀의 일행을 좇자 선배는 아는 사람이냐 물었고 난 선배에게 눈길 한번 안 준채 'xx이'라고 답했다. 이름으로만 그녈 알던 선배는 내 시선을 좇아 둘 중에 누구냐고 캐물었고 난 무심하게도 '힐 신은 애말고'라고 답했다. 아마 이런 상황 속에서 남자끼리 뻔히 오갈 대화의 전개라면 "예쁘네, 왜 헤어졌냐?"라는 반응, 혹 아무 반응이 없는 경우일텐데 선배는 후자를 택했고 이는 그의 눈에 그녀가 별로라는 얘기. "오늘 저녁에 술먹어야겠네? 한잔할까?" 장난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선배였지만 미동조차 않는 마음이 평정의 극치에 머물러있음에 안타까울 뿐이었다, 난 후회가 많은 사람인데도.
헤어지길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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