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이 되어서야 회사 주차장을 나와 집을 향하던 지난 해 마지막 주말, 역삼동을 지나면서야 그녀가 떠올랐다. 여체의 향기가 그립기는 했지만 그녀를 취할 수 있으리라 전혀 기대할 순 없는 우리 사이였다, 그녀가 나를 대하던 무심한 태도를 생각하면 말이다.
바에서 직장인 남성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일을 하던 그녀는 전혀 친절한 말상대는 아니었다. 기껏해봐야 싸구려 양주 한 병 시켜놓고 외로운 남자 두어명이 와 술을 비우고 가는 가게를 찾아와 고고하게 분위기나 잡던 내 허위의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그녀 아니었던가.
많지도 않았던 그녀와의 의례적인 대화가 끝날 무렵 난 언제 동네에서 술이라도 한 잔하자는 진부한 대사를 건네며 전화번호를 물었었고 순순히 번호를 주던 그녀의 호의를 영업 이상으로 생각지도 않았다.
이후 그 흔한 안부문자조차 보낸 적 없었고 가게를 다시 찾은 일 없었지만 그녀에게 덜컥 역삼동을 지나는 길이라며 차라도 한 잔 하지 않겠냐 문자를 보내며 답장을 기대했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의 답장은 간단했다, 데리러 오라며 번지를 찍어준 것.
그렇게 예기치 않은 재회를 하게 되었지만 겨울 냉기와 함께 차에 오른 것은 그녀의 차가운 표정이었다.
커피숍을 향하겠다며 차를 돌리는데 대뜸 그녀는 뭘 마실 생각이 없다고 답한다.
차가운 느낌은 여전했지만 마치 남자들이 자신에게서 뭘 원하는지, 구태여 시간낭비할 이유가 없지 않냐는 듯 잘라말한다.
그렇다고 대뜸 모텔로 차를 몰자니 최소한의 성의라도 표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찾아왔다. 요기라도 하자며 근처 설렁탕집으로 차를 돌린다.
둘 다 음식에 손이 몇 번 가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내 주차하는 모습이 재밌었단다, 한결 누그러진 듯 우스꽝스레 날 흉내내며 미소를 보인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물음에 그녀는 그냥 적적했다며, 만나던 유부남과 관계를 정리했다며 작은 한숨을 내쉰다. 내 질문이 계속될까 귀찮다는 듯 그만 나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
차에 오른 그녀는 내가 미적거릴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아침까지 같이 있어줄 수 있냐는 질문으로 행선지를 정해줬다.
샤워 중인 내게 너무나도 자연스레 미끄러지듯 안기는 그녀.
이제 스무살을 갓 넘긴 통통 튀는 탄력이 손 한가득 잡힌다.
그렇게 한두시간 정념을 다해 쾌락에 열중하던 그녀는 왜 내게 사정하지 않는지 묻는다. 늘상 새로운 상대를 만나면 듣게되는 질문이지만 매번 난 내가 심한 지루를 앓고있고, 지루를 화제로 계속되는 대화에 이골이 날 지경이었는지 그냥 피곤했나보다며 답을 대신했다.
또래보다 훨씬 나이 많은 남자와의 대화가 직업인 그녀, 그녀와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대화가 편안하게 느껴질수록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턱 밑까지 또래친구를 많이 만나보라는 주제넘은 충고가 차올랐지만, 이런 충고를 빙자한 참견마저도 십수차례 들었을 그녀 아니겠냐는 생각에 차라리 난 싱그러운 그녀의 육체에 더 탐닉했다. 그녀는 매번 젖은 꽃잎으로 날 반겨준다.
그렇게 냉기를 흘리던 그녀가 이제는 함께 누워있을 때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내 생김새를 기억해두려 애쓰듯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의식될수록 그녀의 갓 피어난 젊음을 내 편의대로 이용하는 또 다른 남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 그녀를 데려다주고 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가끔, 쿨한 원나잇의 이면에는, 어쩌면, 애정에서 비롯된 존중이 있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녀가 내 위에서 흘렸던 쾌락의 눈물을 떠올리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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