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3년 4월 12일 금요일

도발적이었던...




 길고 곧게 뻗은 다리,
 엉덩이에 올라붙은 적당한 살집,
 골반라인과 어깨라인, 그리고 가냘프게 길게 뻗은 팔과 아름다운 손
 크진 않았지만 아름다운 선을 지닌 가슴.

 'XX이'라 스스로 명명했던 새하얀 그녀의 자동차에서 그 눈부신 다리가 뻗어나오면 행인들의 시선은 온통 그녀에게 쏠리곤 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건 그녀의 아름다운 선과 서구적인 비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과감하고 세련된 패션은 곁에 있던 내가 뭇여성들의 질시 어린 시선을 감지할 정도로 대담했으니까. 십년 전 어느 쌀쌀했던 봄날에도 타이트한 홀터넥 원피스를 입고 청담을 활보하던 그녀였다.    

 그녀가 본 나는 꽤 흥미로운 존재였을테다.

 부유하고 명망 높은 양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범생의 삶을 걸어왔으면서도 놀 줄 모르는 깝깝한 nerd도 전혀 아니었고, 되바라진 날라리 대학생 흉내 속에서도 부모님이 겁나 차 한번 사달라고 말할 생각 못하는 순수한 구석이 남아있는 소년이었으니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래봐야 20대 초반의 그녀 역시 어른 흉내에 여념없는 조숙한 소녀에 불과했겠지만, 그녀는 된장끼로 점철된 청담동 20,30대 미혼 성인여성의 고급 취향에 대해 많은 걸 가르쳐줬다, 선호하는 데이트장소에서부터 패션 스타일, 취미 생활까지도, 
그런 면에서 그녀는 소년을 남자로 키워낸 셈이리라.

 그녀와의 섹스는 정말 경이로운 것이었다.
 침대 밖을 나가기 싫을 정도로 우린 환상적인 궁합을 공유했었고 야외에서의 섹스, 운전 중 BJ를 받는 즐거움, 소품을 활용한 섹스까지 우린 서로를 탐닉하기 여념없었으니까.

 여지껏 만나왔던 오빠들보다 훨씬 순수했을 내게 그녀는 순정을 다 바쳐 사랑해주었다. 그래서 그녀가 가장 먼저 이 다이어리의 첫편에 추억되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으니.

 다만 우리가 데이트를 하고, 섹스를 하고, 서로의 친구들을 만나는, 여느 연인관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그녀를 내 여자친구라 주변인에게 소개하지 않았던건, 내 철 없는 허영욕과 이기심 때문이었다. 지방외고를 나와 모대학 수도권 캠퍼스를 다니던 그녀의 학벌이 내겐 용납될 수 없었던, 부끄러운 그녀의 모습이었으니까.
 늘 선을 긋는 내 태도에 친구녀석들은 자기가 만나봐도 되겠냐며 물어보기까지 했고 난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러라고 답할 정도였다.

 어느덧 그렇게 애매한 상태로 우린 일년을 만났고, 난 내 어린 허영에 부응하는 여성을 만나게 되어 그녀에게 작별을 고했다.

 몇 년이 지나, 그녀가 외적 매력뿐 아니라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었는지, 날 얼마나 순수하게 좋아해주었는지 깨우칠만큼 세월은 흘렀다.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알아낸 그녀의 연락처로 전화해 난 어제도 만났던 사이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차 한잔 마시자고 말했다. 그렇게 우린 실로 오랜만에 마주했고 우리는 늙은이 마냥 함께 나눈 추억을 떠올리는 대화를 한동안 즐겼던 것 같다.
대화의 말미에 쓸쓸한 표정으로 그녀는 내게 물었다,

"내가 언제 너에 대한 감정을 접게 된 줄 알아?"

"아니,  언젠데?"
"기억나? 오빠(그녀는 '오빠'와 '너'로 호칭을 혼용했었다)가 계절학기 혼자 듣기 심심하다고 나더러 꼭 학교로 오라고 그런거?"
"아, 기억나지."

"그때가 우리가 만난 지 일년 무렵이라서 네가 드디어 사귀자는 얘기를 하자는 얘기하려는 줄 알았어."
"......"

"그날, 같이 수업듣고, 오빠가 날 학교 근처 모텔방으로 끌고 갔을 때 난 마음을 접어야겠다 다짐했던거 같아."
"......"


한없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없이  미안해졌다. 
사실 이 추억의 재회가 섹스로 이어지리라 기대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턴 이전처럼 한계를 두지 않고 우리 인연이 닿는데까지 맡겨보고 싶다는 자기합리화로 그녀를 이용하려 한 것인지 모른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내 삶의 '도발적이었던'이란 챕터가 그렇게 끝나감을 통감하며 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