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7년 2월 13일 월요일

2015년 연말의 기억


 체중변화가 유독 심한 나였지만 2015년 연말은 분명 인생 최악의 비만기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연말연시의 가중된 업무량과 연이은 술자리는 이를 의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정말 만나게 되겠어?'  

 두어 달 연락만 주고 받던 그녀의 태도에 난 진짜 그녀를 만나게 되리라 생각치 않았다. 오히려 그런 예단 때문에 더 부담 없이 만남을 재촉했던 것 같다. 해가 가기 전에는 만나야 하지 않겠고 닥달했다. 그럼에도 별 기대는 없었다. 그녀의 매력에 대한 의구심이 아니라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연락 정도 주고받던 관계가 실제 만남으로 이어지는 경우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막상 날 만나겠다고 고한 연말, 그제서야 난 내 낮아진 자존감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거의 패닉상태에 이르렀다,

 '진짜 그녀와 만나게 되는구나'.

 거듭되는 야근에 피부는 푸석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 왕성하던 성생활은 타의적 종말을 맞았다는 자존감 하락에 이르렀지만 '난 정신 없이 일에 바쁜 도회 남성이야'란 식의 허울 좋은 합리화로 자위하던 처지였다. 그럼에도 이를 그녀에게 드러낼 순 없었다. 그녀에게 난 이런 종류의 만남엔 도가 튼 섹스중독자였고 확신 넘치는 태도로 그녀를 주도하는데 익숙한 상남자였으니까. 마침 영동세브란스 장례식장에 회사동료의 빙부상으로 문상을 가야했던 차, 역삼으로 그녀에게 올 것을 명하고 몇 가지 미션을 던졌다. 1. 카운터에 키를 맡겼으니 찾아서 객실에 들어갈 것. 2. 필요하다면 샤워를 하고 객실 안에 벗어둔 내 머플러를 안대삼아 두른 채 객실 문을 살짝 열어놓을 것. 3. 노크 2회를 싸인삼아 입실한 내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것.

 다른 문상객들과 기억도 나지 않을 대화를 서둘러마치고 바로 베리식스로 향해 준비를 시작했다. 그녀가 품은 직한 높은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울 것만 같은 공포가 스물스물 자라났지만 낮아진 자존감이 어찌되었건 이조차 상대성의 문제 아닌가. 막상 본 게임에 들어가면 프로(?)답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마음을 다독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노크를 두 차례 한 뒤 객실로 들어서자 그녀는 내 지시에 한치의 벗어남도 없이 머플러를 안대삼아 두르고 다소곳이 침대가에 앉아있었다. 자그마한 얼굴의 소유자라 머플러가 온통 얼굴을 뒤덮고 있음에도 내 기대 이상의 아름다움을 감출 순 없었다. 그 미끈한 팔라인과 어깨라인이 새삼 내 마음을 주눅들게 했다. 아름다움을 음미하며 그녀를 샅샅이 즐기고 싶으면서도 이렇게 품은 직한 그녀를 실망시키면 어쩌나 두려움이 엄습했다. 탐스러운 머리결을 쓰다듬던 손길이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자그마한 머리를 내 다리 사이로 그녀를 이끌었고 그녀는 잘 훈련된 암캐처럼 다소곳이 무릎 꿇은 채 내 성기를 입에 품는 것이었다.

 그녀를 품으면서도 내내 나의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가려진 그녀의 두 눈이 날 보았을 때 조금이라도 실망의 눈빛이 스치울까봐 두려웠다. 가녀린 그녀의 손가락이 내 몸 곳곳을 스치울 때마다 자신감 없는 내 모습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 몸의 반응이 기능 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섹스의 즐거움에 온전히 탐닉하지 못한 채 그녀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분명한 것은 그녀는 아름다운 육체만큼이나 내면 역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다시 만나자고 얘기하기 조차 내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섹스에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내 마음의 어두운 구석을 내 스스로 견디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덕분에 그 후로 두 어 달 동안 난 내 외형적 자신감을 되찾는데 어느 때보다 애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 중 어느 때보다 가장 근사한 육체와 피부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와의 재회를 꿈꿔본다.
 우연하게도 어느 골프장에서 그 화사한 분위기를 풍기며 클럽하우스를 돌아다닐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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