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탐색기

2015년 3월 3일 화요일

기억의 파편, 고혹


 르네상스 사거리 근방으로 픽업 와달라는 요구에 난처해질 수 밖에 없었다.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서야 직접 운전해 출퇴근하기란 오히려 더 번거로운 일이었고 내게 작년 늦가을 그날 아침은 부지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집에서 십분 내외면 오갈 수 있는 지척이니 귀가 후 차를 끌고 나오면 됐지만 생면부지의 이 여자가 얼마나 매력적인 줄은 몰라도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하기란 너무 밑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대중교통으로 출근했으니 그냥 택시로 픽업하겠노라 이야기하자 이 만남에 꽤 적극성을 보이던 그녀는 돌연 굼떠졌다. 급기야 이제 막 귀가하신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해야 하니 다음에 보자는 그녀에게 빈정이 상했다.
 비록 메신저앱에서 텍스트로 진행된 대화가 전부였지만 시덥지 않았던 대화 속에서도 그녀에게 체화되어 구사된 어휘력은 은근하게 그녀를 빛내주는 것이었고 난 이 은근한 매력에 더욱 그녀를 만나보고 싶었건만 돌변한 그녀의 태도는 더 큰 실망으로 다가왔다. 결국 그녀가 든 핑계의 궁색함을 냉소적으로 비꼬는 메세지를 몇 남겼다. 그리고 나 역시 쿨한 척 'see you when I see you'란 말을 남겼고, 심심할 때 구경이나 하라며 이 블로그 도메인을 남기고 퇴근준비를 시작했다. 조롱섞인 메세지를 연차적으로 보낸 찌질함이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난 기어이 회사사람 하나를 고기와 술 한잔으로 꾀어내어 약속을 마련하고서 회사를 나섰다.

 불판에서 고기타는 냄새가 자켓에 흠씬 베어들고 내 코 끝에선 달달한 소주냄새가 풍기기 시작할 때 즈음 문득 확인해본 전화기에는 블로그를 재밌게 봤다는 메세지를 필두로 내가 궁색하다며 조롱한 그녀의 변이 사실이었고 나만 괜찮다면 지금 만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들어와있었다.
 섭섭함이 일순간 눈 녹듯 사라지며 마음은 급해졌지만 정작 나야말로 궁색한 핑계로 술자리를 파하려니 회사동료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어 아직 야근 중이라는 부서 막내에게 술자리를 인계하며 오만원권 두 장을 찔러줬다. 그리고 바로 택시에 올라 역삼동으로 향했다.

 하차 후 일대를 조금 헤매이다가  감각적인 폰트의 'Hotel The Mat'이 멀찌기 보이기에 발걸음을 옮기다가  그 골목 한구석에 담배를 피우는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임이 분명했다. 언뜻 본 그녀는 160 초반의 키에 화려하진 않았지만 우아한 아름다움이 물씬 느껴지는 미인이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이 어색함을 감당하기 싫으니 빨리 객실로 이끌라는 듯 귀찮음이 느껴졌지만 날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카운터에서 키를 받아들고 객실에 들어섰고 꽤 호사스러운 부띠끄호텔 같다며 아이스브레이커를 건네자 그녀는 내 블로그에 언급된 바 있던 베리식스의 오너가 거느린 또 다른 호텔이라고 말해줬다, 남자친구와 종종 함께 왔단 말을 덧붙이며.
 흡연권이 침해받는 흡연자의 권익에 대해 진지한 척 대화를 나누며 서먹함을 해소하는 중인데 그녀의 몸매와 얼굴에 자꾸 눈길이 갔다. 슬림하면서도 탄탄하게 관리된 몸매였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풍기는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이 워낙 내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만큼 아름답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단숨에 벗겨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면재질의 원피스는 그녀의 말처럼 동네 마실차림이었음에도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자꾸 그녀에 대해 알고싶은게 많아지는 대화였다. 우린 공유할 수 있는 공감대가 참 많았고 비슷한 점도 너무 많았다.

 만족스러운 섹스였다. 그녀 역시 흡족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녀 또한 그러자면서도 이러다 감정이 생기는게 두렵단다. 내 블로그 내용을 들며 자기는 누군가 자기로부터 언젠가 기피되는게 싫단다. 할 말이 없었다.
 업계 신문에 기고요청을 받아 작성한 칼럼 초안을 봐달라며 건네자 그녀는 아름다운 나신으로 침대에 누워 아이패드를 얼굴로 향했다. 그때 화면빛을 조명삼아 은은하게 드러나던 고혹적인 그녀의 얼굴이 생생하다. 좋은 기억을 간직한 채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결국 그녀는 내 예감처럼 연락을 끊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우린 선자리에서 만났더라면 서로에게 최고의 상대가 되어주었을거란 말이 맞는 것 같다.

 섹스도 공히 만족스러운 것이었고 서로 호감 이상의 감정으로 관계를 가졌지만 원나잇으로 그친 경험이 몇  번 있다. 그럴 때마다 아쉬움은 잔존하지만 미련이 생긴 적은 없었다, 섹스로 시작된 관계이기에 내가 감내해야할 댓가이자 성장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만큼은 간절히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갈망해본다. 참 반가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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